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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 생활: 과학적 사실의 구성
브루노 라투르·스티브 울거 지음 / 이상원 옮김
한울아카데미 / 2019-01-07 발행 / 신국판 / 양장 / 384면 / 43,000원
ISBN 978-89-460-7116-2 93330
분야 : 사회학, 과학·과학철학
 
  ■ 과학철학, 과학사, 과학인류학, 과학사회학을 아우르는 과학학의 현대 고전

현대사회는 과학자들의 연구에 지대하게 영향받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과학적 사실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과학기술사회학의 세계적 석학 브루노 라투르는 과학적 사실은 도구 의존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실험 도구에 의존하지 않고 과학적 사실을 탐구하거나 구성하려는 시도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라투르에 따르면 과학 실험의 중심은 과학자(인간)가 아니라 엄청난 자본이 투입된 물적 설비(도구)다. 그리고 과학적 사실은 과학자들의 토론이나 합의가 아닌 실험실의 수많은 설비가 산출하는 데이터가 신뢰할 만한 수준에 이르는 어느 지점에서 구성된다. 라투르는 그의 주장의 근거로 1977년 노벨 생리의학상의 주제인 TRF(H) 호르몬의 발견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실험실 생활』은 미국의 한 생물학 연구소에서 TRF(H) 호르몬의 발견이라는 과학적 사실이 언제,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졌는지를 2년간 현지조사한 결과물이다. ‘과학적 사실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과학철학적 주제를 현지조사라는 인류학적 방법론으로 풀어냈다. 그래서 이 책은 과학철학, 과학사, 과학인류학, 과학사회학을 아우르는 과학학의 현대 고전으로 손꼽힌다. 이 책을 통해 현대 과학철학계는 과학이란 인간인 과학자와 물질인 실험 도구 간에 벌어지는 활동이라는 인식을 얻게 되었다. 라투르의 첫 번째 저작이자 대표작이며 그의 사상의 출발점에 해당한다.

■ 철학자, 생리학 실험실에 들어가다

현대사회는 과학자들의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다. 사람을 달에 보내거나 시험관에서 아기를 만드는 과학자들은 현대사회의 마법사이고 실험실은 마법의 공간 같다. 하지만 일반 대중은 과학자들이 어떻게 이런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실험실에 틀어박힌 채 이들은 도대체 무얼 하는가? 어떻게 과학적 발견과 사실을 생산해내는가?

1975년 프랑스의 철학자 브루노 라투르도 비슷한 의문을 품었다. 궁금증을 풀기 위해 그는 직접 과학 실험실에 들어가 과학자들을 관찰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인류학자들이 즐겨 쓰는 이른바 현지조사 방법론이다. 아프리카 등지의 고립된 부족을 연구할 때 인류학자가 부족 사이에 들어가 이들과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며 관찰하는 조사 기법이다.

원시 부족도 아닌 문명사회의 과학자 집단을 현지조사 방법으로 연구하는 것은 이 연구가 실시된 1970년대는 물론 지금 들어도 꽤나 흥미로운 아이디어다. 철학자가 실험실 과학자들의 대화 내용을 이해할 수는 있었을까? 졸지에 관찰자(실험자)에서 피관찰자(실험체) 신세가 된 과학자들이 당황해하지는 않았을까? 이 책은 생물학 연구로 유명한 미국 소크연구소의 한 실험실에서 철학자가 과학자들을 지켜본 2년간의 결과물이다.

■ 과학적 사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브루노 라투르가 과학자들을 관찰하기 위해 찾은 곳은 미국 소크연구소에 소재한 로제 기유맹 교수의 생리학 실험실이었다. 기유맹은 뇌의 시상하부에서 분비되는 TRF(H)라는 호르몬을 발견한 공로로 나중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저명한 생리학자다. 당시는 TRF(H)라는 물질을 둘러싸고 과학계가 들썩이던 시기였기에 라투르는 ‘TRF(H) 발견’이라는 과학적 사실이 언제, 어떤 방법을 통해 구성되고 동료 과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는지 관찰하고자 했다.

일반 대중은 과학적 사실이란 과학자 개인의 천재성이나 기발한 착상에 힘입어 생산된다고 여긴다. 아르키메데스가 목욕을 하다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했다는 것이나 뉴턴이 사과나무 아래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며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그렇다. 하지만 라투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과학적 사실은 그렇게 구성되지 않는다. 놀랍게도 『실험실 생활』에서 실험실의 중심은 과학자(인간)가 아니다. 실험실의 주인공은 엄청난 시간과 자본이 투입된 실험실의 물적 설비(도구)다. 그리고 과학적 사실은 과학자들의 착상, 토론, 합의 등의 과정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각양각색의 값비싼 기계들과 컴퓨터가 토해내는 실험 수치가 안정화되고 신뢰할 만한 수준에 도달하는 어느 지점에서 구성된다.

TRF(H)의 발견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TRF(H)는 인간 등 동물의 뇌에서 생성되는 유기물인데 체내에 아주 극소량만 존재한다. 그래서 어지간한 실험 도구로는 검출할 수 없다. TRF(H) 수 그램을 얻기 위해 양과 돼지의 뇌를 수천 톤 소모하는 실험이 십수 년간 반복되었다는 것은 이 물질의 검출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잘 알려준다. 극히 미미한 물질이기에 TRF(H)의 검출은 이 물질이 산출하는 실험 데이터를 주변의 배경 잡음과 어떻게 구분해내느냐가 관건이었다. 이것은 과학자 개인의 역량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어느 실험실이 더 많은 실험 재료를 구입할 수 있고 더 비싸고 강력한 설비를 갖추었느냐에 달린 문제였다.

라투르의 이런 설명은 과학적 사실이 구성될 때의 물질적, 기술적, 실천적인 측면을 보여준다. TRF(H) 발견에는 기유맹만이 아니라 영국, 일본, 체코슬로바키아 등에서 수많은 경쟁자가 달려들었다. 하지만 TRF(H) 발견에 따른 노벨상의 영광은 로제 기유맹과 역시 같은 미국의 연구기관 소속이었던 앤드루 샬리에게 돌아갔다. 기유맹이 소속되었던 소크연구소는 미국 정부의 든든한 자금 지원하에 10여 년간 막대한 연구비 지출을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경쟁자들은 그런 출혈을 견디지 못했고 하나씩 도태되어버렸다. 라투르는 이런 관찰 결과를 토대로 도구에 의존하지 않고서 과학적 사실을 탐구하거나 주장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본다. 기유맹의 TRF(H) 발견 역시 철저하게 도구 의존적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한다.

기유맹의 실험실에서 보낸 2년 동안 라투르는 과학 연구의 일상적이고 내밀한 과정을 면밀히 따라갔다. 기유맹의 실험실은 과학자, 실험 기술자, 사무직원 등 수십 명으로 구성된 거대한 실험 공장 같은 곳이었다. 이 실험실에서는 연구 방향을 잡고, 실제 실험을 진행하고, 실험 보고서를 쓰고, 논문을 출판했다. 여기에는 경쟁 관계에 있는 실험실의 진척 상황을 파악하고, 연구비를 내주는 후원자들을 설득하는 일도 포함되었다. 실험실에서 진행되는 모든 일상적인 작업의 세부 내용을 라투르는 직접 관찰하며 과학적 사실이 구성되어가는 과정과 그것의 인식론적인 의미를 파헤쳤다.

■ 과학학(Science Studies)의 현대 고전

『실험실 생활』은 과학철학과 과학인류학을 융합한 연구다. ‘과학적 사실이란 무엇이냐’는 과학철학적 주제를 실험실 현지조사라는 인류학적 방법론으로 풀어냈다. 2010년대 들어 한국 과학계에는 융합이나 통섭 등의 아이디어가 각광받고 있는데 브루노 라투르는 이를 거의 반세기 전에 실천에 옮긴 셈이다. 그래서 이 책은 과학철학, 과학사, 과학인류학, 과학사회학을 통섭하는 ‘과학학의 현대 고전’으로 손꼽힌다.

라투르 연구의 특징은 과학의 실천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과학철학자나 과학사회학자가 그들의 머릿속에서 그려보고 기대하고 짐작하는 과학이 아니라 진짜 실험실에 들어가 과학자들의 실제 모습을 지켜보며 과학적 사실의 구성을 논의하고 있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과학철학과 과학사학계는 이성, 관념, 사변이라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과학 활동을 묘사했다. 하지만 라투르는 도구, 물질, 기술의 관점을 새롭게 채용해 기존 시각이 지닌 한계를 보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책을 통해 현대 과학철학계는 과학이란 인간인 과학자와 물질인 실험 도구 간에 벌어지는 활동이라는 인식을 얻게 되었다.

라투르는 과학기술사회학의 세계적인 거장이며 국내에 이미 그의 저서가 여러 종 번역 출간되어 있다. 『실험실 생활』은 라투르의 첫 번째 저작이자 대표작인 만큼 국내 번역이 많이 늦은 편이다. 오랜 기간 번역되지 않은 채로 소개된 탓에 국내에서는 이 책을 두고 사회구성주의의 주요 작품이라는 오해가 적지 않다. 즉, TRF(H)의 발견은 기유맹과 샬리가 실험 데이터를 보정하는 기준에 합의를 본 결과이며, 이른바 과학적 진리라 불리는 것들도 과학자 사회에서 구성된 관념에 불과하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라투르의 논지는 과학자들의 합의가 아니라 실험실의 물질적 조건(도구)에 따라 과학적 사실이 구성된다는 것이니 사회구성주의의 입장과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한국어판 출간을 계기로 이런 세간의 오해가 불식되기를 기대한다.

라투르의 다른 저서보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그의 사상의 출발점 역할을 한 저작을 선보일 수 있어 다행스럽다. 현재 라투르는 파리정치연구대학교 명예교수로 있으며 여전히 활발하게 연구 활동 중이다. 영국 출신의 사회학자이자 책의 공저자인 스티브 울거는 라투르의 현지조사 자료를 토대로 그와 함께 이 책을 썼으며 지금은 옥스퍼드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도입 _조나스 소크
제1장 질서에서 무질서로
제2장 인류학자가 실험실을 방문하다
제3장 사실의 구성: TRF(H)의 경우
제4장 사실의 미세처리
제5장 신용의 순환
제6장 무질서에서 질서의 창조
2판 후기(1986년)